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개인이 철저히 부서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시대가 달라도 읽는 사람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덕혜옹주의 삶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국가를 잃은 황녀 한 명이 어떻게 무너져 갔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역사 기록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 붕괴 일지를 읽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보온병 하나에 담긴 공포, 강박증의 시작
어린 시절부터 항상 직접 가져온 보온병의 물만 마셨다는 덕혜옹주의 습관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고종이 평생 짊어졌던 독살 공포가 딸에게 그대로 전이된 결과였습니다. 여기서 강박증(Obsessive-Compulsive Disorder, OCD)이란 특정 불안을 통제하기 위해 반복적인 행동이나 의식을 수행하지 않으면 극심한 불안을 느끼는 심리 장애입니다. 덕혜옹주의 보온병 집착은 교과서적인 OCD 증상에 해당합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유독 마음이 걸렸던 이유가 있습니다. 저 역시 살아가면서 제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거대한 조직의 압박 속에서 작은 통제 행동에 집착하게 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극에 달했을 때, 사람은 아주 사소한 루틴 하나에 매달리게 됩니다. 덕혜옹주의 보온병이 바로 그것이었을 겁니다.
1929년 어머니 양귀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귀국했을 때 일제가 내세운 논리는 더 잔혹했습니다. 왕공족(王公族) 규범, 즉 일제가 구 황실 인사들에게 적용한 신분 규제 체계를 근거로, 나인 출신인 어머니의 장례에서 상복 착용 자체를 금지시켰습니다. 여기서 왕공족 규범이란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실 구성원을 일본 황족의 하위 범주로 편입시켜 행동을 제약한 법적 틀을 의미합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딸이 슬픔을 표현할 권리조차 법으로 봉쇄한 것입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이야기가 단순한 비운의 서사가 아닌 제도적 폭력의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덕혜옹주의 심리적 붕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 요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버지 고종에게서 전이된 독살 공포와 강박적 회피 행동
- 어머니 임종 불참 및 상복 착용 금지로 인한 애도 박탈(Grief Deprivation)
- 낯선 타국 생활 속 지속적인 정체성 해체
19세에 찾아온 조발성 치매, 조현병의 기록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덕혜옹주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습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 정원을 배회하는 몽유병 증세가 반복되었고, 19세의 나이에 조발성 치매(早發性 癡呆)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조발성 치매는 오늘날의 조현병(Schizophrenia)에 해당하는 구분류 명칭으로, 현실 인식의 왜곡, 환각, 와해된 사고 등을 주요 증상으로 합니다. 당시에는 이 질환에 대한 이해가 극히 부족했고, 치료보다는 격리가 일반적인 대응이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조현병은 전 세계 인구의 약 1%가 경험하는 질환으로, 발병에는 유전적 소인과 함께 극심한 심리사회적 스트레스가 주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 덕혜옹주의 경우, 국권 상실, 강제 이주, 모친 사망, 문화적 단절이 겹친 환경은 그 어떤 임상 교과서가 제시하는 발병 조건보다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아무리 강한 사람도 사방이 막히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면 내면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덕혜옹주가 유독 의지가 약해서 병을 얻은 게 아닙니다. 그 구조 자체가 병을 만들었습니다.
1931년에는 일본 궁내성의 주도 아래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이 강제로 성사되었습니다. 당시 국내 언론이 신문 사진에서 남편의 얼굴을 삭제하고 보도한 것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편집 행위이지만 당시로서는 강점에 저항하는 민족 정서를 활자 없이 표현한 방식이었습니다. 이후 딸 마사에를 출산했지만, 대마도 방문 중 조현병 증세가 급격히 재발하며 기이한 웃음을 터뜨리는 등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습니다.
37년의 공백, 그리고 귀국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귀족 제도가 폐지되면서 남편 소 다케유키는 경제적 파산을 맞이했고, 덕혜옹주는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 홀로 수용되었습니다. 여기서 귀족 제도 폐지란 1947년 일본 신헌법 시행으로 화족(華族) 신분 자체가 법적으로 소멸된 것을 가리킵니다. 한순간에 신분과 재산과 남편을 동시에 잃은 것입니다.
이 시기 덕혜옹주의 존재를 세상에 다시 알린 인물이 기자 김을한입니다. 1950년 일본 정신병원에서 그녀를 직접 발견한 그는 이후 12년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를 설득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정부가 귀국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정치적 정통성 문제와 구 황실에 대한 시선이 뒤엉킨 결과였겠지만, 이 방치는 일제의 잔혹함과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상처 입혔습니다. 국립정신건강센터가 제시하는 외상 후 회복 조건의 핵심 중 하나가 '소속 공동체의 인정과 수용'이라는 점을 떠올리면(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12년간의 귀국 거부가 그녀의 회복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가늠조차 쉽지 않습니다.
귀국 직전, 일본에서 실종된 딸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가족을 완전히 잃은 채 1962년 52세의 나이로 귀국한 덕혜옹주는 공항에서 어린 시절 유모였던 변복동과 재회했습니다. 그 장면을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진 건, 거창한 역사의 복원이 아니라 그냥 사람 하나가 오랜 세월 끝에 겨우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창덕궁에서 지내다 1989년 78세로 생을 마감한 그녀의 삶은, 화려한 황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에 짓밟힌 한 개인의 기록으로 읽혀야 합니다.
덕혜옹주의 삶을 들여다보고 나서 한 가지가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국가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부서지는 것은 제도나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살던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비극적인 감상으로만 소비하는 시선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힘없는 개인이 거대한 구조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냉정하게 직시하는 텍스트로 읽어내는 것이 덕혜옹주를 제대로 기억하는 방식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