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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널 비하인드 (오프닝, 촬영 현장, 한국 사회)

by 무명_moomyoung 2026. 6. 19.

살면서 한 번쯤은 느껴봤을 것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지지 않고,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혼자 갇혀있는 것 같은 그 시간. 저도 그런 슬럼프를 통과한 적이 있어서인지, 영화 <터널>의 제작 비하인드를 들여다보는 내내 스크린 너머로 무언가가 계속 걸렸습니다. 단순히 "잘 만든 재난 영화"가 아니라, 그 고립의 감각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했는지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프닝 3분이 영화 전체를 품는 방식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정수(하정우 분)는 물을 하수구에 버립니다. 관객 대부분은 무심코 넘기지만, 이 장면은 이후 정수가 생수 한 병으로 수십 일을 버텨야 하는 상황을 암시하는 복선(伏線)입니다. 복선이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미리 예고하는 서사적 장치로, 잘 쓰면 영화가 끝난 뒤 다시 첫 장면이 떠오르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멀리 펼쳐지는 벼 들판, 황금색 햇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하정우의 시선까지 포함하면, 이 오프닝은 사실상 영화 전체의 축소판입니다.

하정우 배우가 스스로 제안한 햇반 소품도 이 맥락에서 빛납니다. 제가 직접 그 장면을 다시 보니, 그게 단순한 음식 PPL이 아니라 "일상의 당연함"이 얼마나 빠르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읽혔습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워준 직원, 내비게이션 음성 안내까지 모두 이후 정수의 생존과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실제로 내비게이션 목소리는 아틀란 3D의 실제 안내음을 녹음한 전숙경 성우가 담당했는데, 이 디테일 하나가 현장감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고 봅니다.

오프닝의 밀도를 이해하고 나면 김성훈 감독의 미장센(mise-en-scène)이 달리 보입니다. 미장센이란 프레임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소품, 색채 등을 통해 감독이 의도하는 의미를 구현하는 영화 연출 개념입니다. <터널>에서는 공간이 좁아지고 어두워질수록 정수의 심리 상태가 프레임 구도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이것은 재난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공식이지만, 이 영화는 그 공식을 오프닝 3분 안에 이미 심어놓습니다.

촬영 현장의 물리적 리얼리티

터널 붕괴 장면 하나를 찍는 데 들어간 공은 상당합니다. 옥천터널을 새 터널처럼 꾸미기 위해 가드레일과 도로 외벽을 전부 새로 제작했고, 그 비용만 약 10억 원이 투입되었습니다. 영화 제작에서 프로덕션 디자인(production design)이란 촬영 공간 전체를 이야기에 맞게 설계하고 구현하는 작업을 말하는데, 실제 폐쇄 터널을 새 건축물처럼 변환한 이 작업은 그 자체로 프로덕션 디자인의 교과서적 사례에 가깝습니다.

세트 내부도 쉽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터널의 분진을 표현하기 위해 콩가루, 미숫가루, 숯가루를 배합한 가루를 매 테이크마다 공중에 날렸습니다. 인체에 무해한 재료를 선택했지만 실제로 눈에 들어가 하정우 배우의 눈이 충혈되었고, 콩가루를 지속적으로 흡입해 폐 CT까지 찍었다고 합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이마에 난 뾰루지가 1년 넘게 남아있었다는 후일담은, 이 영화의 "리얼함"이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물리적인 비용을 치른 결과라는 걸 보여줍니다.

저도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제 슬럼프 시절이 오버랩되었습니다. 당시 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상황 자체보다 그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감각이었는데, 정수가 분진 속에서 한 테이크씩 버텨나가는 장면은 그 무력감을 통과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불 꺼진 실제 영동고속도로 터널 안에서 슈팅카와 함께 달리며 진입 장면을 찍었다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하정우 배우는 조명이 꺼진 실제 터널에서 공포심을 느꼈고, 그 감각이 연기에 그대로 스며들었다고 합니다. 촬영 중 급브레이크 장면에서 카메라가 날아가 앞 유리가 깨지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이 또한 필름에 담긴 리얼리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블랙코미디로 읽는 한국 사회의 민낯

재난 영화의 공식적 문법은 대개 이렇습니다. 위기 발생, 영웅의 등장, 감동적인 구조. 그런데 <터널>은 이 공식을 비틀면서 훨씬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장관이 구조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 언론사 드론들이 경쟁적으로 하늘을 뒤덮는 장면, 그리고 도롱뇽 서식지 보호를 이유로 공사가 중단되는 상황. 이 모든 설정이 개연성 없는 과장이 아니라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도롱뇽 관련 대사는 2001년 경부고속도로 원효터널 공사 당시 도롱뇽 서식지 파괴 문제로 공사가 중단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오달수 배우의 애드리브인 "도롱뇽은 파충류가 아니라 사람입니다"는 정의롭지만 지식이 부족한 캐릭터를 한 문장으로 완성시키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어설픈 선의를 날카롭게 풍자합니다. 참고로 도롱뇽은 파충류가 아닌 양서류입니다.

블랙코미디(black comedy)란 비극적이거나 불편한 현실을 유머의 형식으로 포장해 관객이 웃으면서도 씁쓸한 진실을 마주하게 만드는 장르적 기법입니다. <터널>이 성공적으로 이 기법을 구사하는 건, 웃음의 근거가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터널 구조물 안전 점검의 정기 실시율은 여전히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출처: 한국소비자원).

제가 직접 영화를 다시 보면서 느낀 건, 이 풍자가 불특정 집단을 향한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를 향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언론, 행정, 공사 현장, 그 어느 하나도 나쁜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나쁜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는 보통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 지점이 단순한 고발을 넘어 씁쓸한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터널>이 참고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 중 하나로,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도로 터널 안전 관련 지침도 눈여겨볼 만합니다(출처: 국토교통부).

서사의 완성도와 아쉬운 균열

<터널>이 탁월하게 설계한 구조 중 하나는 정수의 공간이 점점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초반에는 차 안에 갇혀 있다가, 강아지 탱이와 함께 좁은 공간을 탐험하고, 미나(남지현 분)를 만나면서 공간과 관계가 동시에 확장됩니다. 카메라 앵글도 이에 맞춰 와이드(wide angle)로 전환되는데, 와이드 앵글이란 넓은 화각으로 촬영하여 공간감을 극대화하는 기법입니다. 이 시각적 변화가 정수의 심리 회복과 맞물리면서 관객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숨이 트이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윌슨 공을 오마주한 축구공 설정, 빨래를 엮어 목도리를 만들고 자동차 카탈로그를 찢어 공간을 꾸미는 디테일들은 낙천성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으로 처리됩니다. 하정우 배우가 촬영 시작부터 수염과 손톱을 깎지 않고, 다이어트와 함께 촬영 공백일에 200km를 걸었다는 사실은 이 캐릭터가 얼마나 물리적으로 구축된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반부의 촘촘한 사회 비판적 시선이 후반부로 갈수록 한 개인의 감동적인 탈출 서사로 빠르게 수렴해 버립니다. 공기가 밀폐된 터널에서 시동을 걸어 조명을 켜는 행위는 일산화탄소 중독이라는 현실적 위험을 내포하는 설정상의 구멍이기도 합니다. 좁은 통로를 머리부터 밀어 넣고 탈출하는 장면은 긴박감을 주는 데 성공했지만, 오프닝이 보여준 사실주의적 밀도와는 살짝 다른 결을 냅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디테일과 설계 수준을 감안하면, 이 후반부의 장르적 허용은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프닝의 신선한 비틀기를 끝까지 밀어붙였다면 어떤 영화가 됐을지, 그 가능성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터널>이 남긴 가장 큰 질문은 이것입니다. 재난 앞에서 우리는 정말 달라질 수 있는가. 제 경험상 가장 막막한 순간을 버티게 해준 건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정수가 미나에게 건넨 생수 한 모금 같은 사소한 온기였습니다. 영화는 그 답을 명쾌하게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27초간의 블랙 화면처럼 침묵 속에 질문을 남겨둡니다. 이 영화를 다시 볼 계획이라면, 오프닝 장면에서 정수가 물을 버리는 그 3초를 한 번 더 지켜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VkH4IeKZZ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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